2001년 9월 11일 오전 9시 3분 AA11편이 항로를 바꾸어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과 충돌한 직후인 09시 3분 UA175편이 남쪽 건물과 충돌하였다. 이 단 두 방의 비행기 테러로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은 그 흔적조차 같아보기 힘들 정도로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이로 인해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고 또한 성전이라고 말 되어지는 이라크 침공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그 뒤편에 숨겨있던 그 죽어갔던 테러범의 한마디를 되살려보자.
' 신은 하나다.'
과연 우리는 이러한 죽음의 공포마저 뛰어넘은 초월적인 신념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여 하겠는가?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감독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거대한 전쟁영화 'Kingdom of Heaven'에서 성전이라고 말해지는 십자군 원정에 대하여 그리고 있다. 올 랜도 블룸의 멋진 모습과 에바 그린의 섹시함 속에 숨어있던 예루살렘이라는 곳에 의미는 무엇인지, 또 그 전쟁 속에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속에는 신은 존재하였는지 생각해보았는가?
그리고 세계적 명작이라고 말 되어지는 '미션' 이라는 영화 속에서 우니는 주인공의 순결한 선교활동이라는 것에 모든 영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한 가지 잊고 있는 것은 과연 그 사람의 선교활동이 그곳에 사람들에게 보다 낳은 행복을 선사하는 것인지 또 그 원주민의 생활 속에서 묻어난 신앙이 잘못된 것인지는 생각해보았는가?
한번 우리나라의 이야기를 해보자. 얼마 전 두 사람의 생명이 이 지구에서 사라지고 한국의 재력의 힘과 적십자라는 단체의 저력, 그리고 선교라는 것에 대하여 논란을 야기했던 샘물교회의 선교와 피랍, 그리고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단순히 테러단체와 어떠한 협상도 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강한 신념과 사뭇 다른 대한민국의 빠르고 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한 협상으로 인해 2명의 희생자와 무책임한 선교라는 질타가 그 사건의 전부인가. 아니면 그 속에 왜 그 사람들은 선교라는 것을 떠나야 했으며 혹시 그것을 강요받은 것은 아닐지 생각해보았는가?
과연 이러한 모든 것들이 신이라는 존재가 인간에게 바라는 단 하나의 행동 이였을까? 라는 것에서 이글을 시작해보고자 한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당신들이 말하는 종교는 아편으로 만든 마취약과 같은 작용만 할 뿐이다. 매혹시키고, 달래주고, 허약함에서 오는 고통을 잠재워줄 뿐이다."
이 말을 가장 많이 쓰는 곳은 단 한곳이 있다. 그곳은 바로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으로 이어지는 공산주의에서 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노발리스의 말을 마르크스의 말로 알 정도로 공산주의에 종교에 대한 강한 부정은 크기만 하다. 단순하게 기독교의 전파방법과 공산주의의 전파방법이 같기 때문이라는 혹자들의 설명은 이것을 규정하기에는 힘들 것이다. 소련이 공산주의로 변화되고 모스크바의 대성당은 허물어졌으며 그 자리에는 인민들의 안락함을 선사하는 커대란 수영장으로 대체되었다.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일까? 종교는 시대를 변화하면서 그 시대에 지배자의 권력을 형성하는 것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불교의 내세사상과 인과율이라는 것에서 계급사회의 타당성을 주었으며 천주교의 교황에서 전파되는 강력한 왕권의 힘으로써 고대 로마의 왕권은 그 지배면적만큼 커다란 힘을 가져다주었다. 왜 그러한 힘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종교의 근본은 현실에 있지 않다. 라고 단언할 수 있다. 모든 종교는 죽음 이후의 자신에게 있으며 그렇기에 현실에서 아무리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도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죽음이라는 벽을 넘어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파하고 있다. 만일 죽음 이후에도 현실과 같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종교가 있다면 그 종교는 전파도 되지 않고 곧바로 사라질 것이다. 그렇기에 천주교와 기독교에서는 천국을 불교에서는 안락한 후생을 보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종교의 특징은 곧 그 사회의 불합리함을 극복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아무리 불합리하고 올바르지 못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죽음 이후에는 다른 세상이 나를 맞이할 준비이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현실을 바로 직시할 수 없으며 그것을 극복할 의지조차 꺾여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현실에서 비현실적으로 도피하는 아편과 같은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은 종교의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의 사회적인 측면을 바라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종교의 근본적은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자.
죽음. 그리고 인간
과연 종교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엇일지를 인간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해보자.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라는 대명제는 존재한다. 그것은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것,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사람의 안식이라고 불리는 죽음이라는 존재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내 옆에서 살고 있던 사람이 더 이상 나와 함께 삶을 영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여주며 그 사실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함께 살아왔고 또한 자신의 기억 속에 살고 있던 하나의 존재에 대한 소멸을 말하는 말이며 앞으로는 그 존재를 부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창조하고 그 속에서 죽은 자가 살고 있다고 생각을 하였으며 그 모든 것을 주관하는 하나의 신이 있다고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 신은 생명이라는 것을 다루며 자신의 생명과 죽은 자의 생명 또한 신의 소관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프랑스 도르도뉴라는 작은 마을에서 라페라시 유적이라고 불리는 네안델타인의 유골이 대량으로 발견이 된 곳이 있다. 그 속에는 한 아이의 유골이 발견이 되었는데, 이 유골은 다른 유적지와 사뭇 다른 형태로 매장이 되어있었다. 시신이 들어갈 만한 작은 구덩이 위로 커다란 돌을 올리는 식의 무덤 이였지만 그 커다란 돌에 일정한 무늬의 새김을 넣었다는 것이 특이한 것이다. 그것은 커다란 돌을 올리는 것으로 동물들로부터 시신을 안전하게 지키면서 보다 좋은 세상으로 가라는 부모의 작은 마음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종교의 발생에 대하여 말씀하신 어느 교수님의 말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죽음이라는 곳에 가까이 있는 목축을 주된 일로 하는 지방에서 현재의 주된 종교가 발생을 하였으며 농업을 주된 일로 하는 지방이었던 곳에서는 현재에까지 영향이 있는 철학이 발견되었다. 생각을 해보면 이는 인간이 가장 많이 접하는 곳에서 느끼는 것이 학문으로 발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선 농업을 주된 일로 하는 곳에서는 계절이 바뀜에 따라 식물이 커가는 모습도 어떠한 일을 하야 하는 것인지도 정해져 있으며 그에 자연이라는 것에 조화와 규칙성을 알게 될 것이다. 이는 규칙적인 하나의 학문이라는 것으로 발전을 하였고 그 학문은 철학이라는 것에 이름으로 자연과 인간이라는 것에 대한 규칙적인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생명에게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이라는 것은 아무런 규칙성도 없는 일련의 사건에 대한 질문에는 앞에서 말하였던 초월적인 존재의 판단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종교라는 형태로 발전이 되었던 것이다.
신은 인간에 소원풀이 창고
사람들은 기도라는 것을 한다. 때로는 감사함이 기도를 올리기는 하지만 주로 하는 것은 무엇을 원한다는 기도이다. 마치 아버지에게 때를 쓰는 아이와도 같이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라는 식의 기도가 주를 이룬다. 정 궁금하면 지금 종교라는 단체에 가서 조용하게 기도를 하는 소리나 사람들이 하는 행동들을 유심히 보자. 그러면 열에 아홉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말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을 위해 기도라는 행위를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참으로 재미있는 발상이 아니던가. 자신을 지배하고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바치겠다던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자신이 믿는 사람에게 무엇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만 하는 것은 아닌가. 예를 들어보자, 얼마 전 수학능력시험이라는 것이 끝이 났다. 그 날 아니면 그 전날, 종교를 믿는 곳에 가본 적이 있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의 아들이 시험에 잘 보기를 기도라는 수단으로 신에게 바라고 있다. 아니 노골적으로 이야기 해보자. 대학이라는 시험의 특성상 경쟁이라는 체제에 아이들은 놓여있는 상태이고 한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대학이라는 곳을 붙으면 다른 아이는 그곳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 한국의 대학 시스템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 사람들의 기도는 자신의 아이만 원하는 곳에 붙게 되기를 바라는 참으로 이기적인 발상이 아니던가. 이러한 이기적인 발상을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신에게 인간들은 기도라는 수단을 이용해서 강요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많은 종교단체에서는 신이 인간에게 내린 많은 것들을 강조하고 그것에 대하여 감사하라는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별로 실용성은 없어 보이지만.
종교인의 집단주의
종교는 단한명의 종교를 믿는 사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것을 믿고 그 믿음이 종교로 발전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종교는 거대한 무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그 무리는 하나의 단체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단체는 그저 종교의 단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생각의 사람들을 말살하고자 한다. 아니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명동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보자 그러면 '불신지옥'이라는 말을 들고 열심히 선교를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될 것이다. 이는 내가 믿는 종교를 당신이 믿지 않는 다면 당신은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재미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에 그 종교가 들어온 지 약 100년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종교 말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그 전에 우리 조상들은 다 지옥으로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이분법적으로 갈라놓은 다는 이야기가 되면 자신이 아니면 다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남과 자신이 다르다고 말을 하는 것은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그것은 자신들이 믿는 신앙이야말로 절대적으로 옳은 진리에 길로 간다는 것과 같은 말인 것이다. 이는 복음주의로 말하고 있는 한국기독교의 대표적인 주의에서 시작되는 것인데, 이의 발달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의 개신교에 모태가 된 미국에서는 19세기 당시에 유럽에서의 두 가지에 커다란 펀치를 맞게 되었고 그 두 가지의 커다란 펀치는 다윈의 진화론과 성거를 역사적으로 입증이 되지 않는 다면 그것은 성서의 교리가 아니라는 고등 비평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미국에서는 세속적인 것을 버리고 성서만을 강조하다 보니깐 성서를 문자적으로써 이해함으로써 기독교를 방어하려고 한 것이다. 그렇기에 성서에 나온 종말이라는 것을 맹목적으로 믿기 시작했고 그것은 오로지 선교를 통하여 준비할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복음주의는 우리나라에 강하게 심어졌고 그 심한 복음주의에서부터 한국 기독교의 배타적인 스스로에게만 진리가 존재한다는 발판이 되어왔던 것이다.
그러한 진리적 교리와 신앙심은 한국 기독교의 구심점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러한 구심점은 단순하게 한국 기독교의 거대화만을 야기한 것은 아니다. 그 거대화된 기독교의 힘은 여러 방면으로 미치게 되었고 미국을 마치 우리의 형제라고 말하고 소위 말하는 친미정치에 선봉대가 되고 있는 것이 지금에 현실인 것이다. 지난 소고기 파동으로 발생된 촛불집회에서 원로 기독교에서는 이 촛불집회가 북한의 사주를 받은 악의 축이라고 말하고 규정지었다. 그리고 미국은 우리와 함께 피를 나눈 형제이기에 믿고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주장은 마치 그 주장이 자신들의 신앙처럼 진리이고 사실인양 주장하고 있는 것이 지금에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악의 축, 그리고 지옥과 천당 (도구로써의 종교)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에도 유럽이 예루살렘을 정복하였을 때에도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신의 뜻' 혹은 성전, 그와 반대로 이라크 침공을 막기 위해서 팔레스타인이나 여러 아랍계 무장단체에서 이라크에 들어와서 썼던 말도 또한 자하드, 즉 성전이라는 말이다. 이 성전이라는 것을 합리화 시키는 것은 나와 다른 곳은 악의 축이라는 것이고 또한 사탄에 꾀임에 넘어간 단체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신의 뜻을 이어받은 내가 그 사람들을 물리쳐서 성스러운 땅을 건설하는 행위를 말하며 이는 자신이 아무리 그 사람들에게 사악한 짓을 해도 그 행위는 사악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자신의 살인 행위가 정당화하는 이유를 대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지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영토분쟁을 이야기 해보자. 이스라엘의 무차원적인 폭격과 재력으로 바탕으로 한 세계 강대국들의 이스라엘에 동조, 그리고 세계강대국들에 팔레스타인의 비난으로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난 이 영토분쟁에서 우리는 수많은 어린이들의 죽음과 평생을 장애로 살아가야 하는 수많은 그림을 보았고 또한 집을 잃고 정든 고향을 떠나야하는 많은 사람들의 어려운 삶을 뒤로하고 이스라엘의 신에 뜻을 행하는 것을 광고하는 수많은 선전들과 뉴스를 들어야했다. 한 가지를 더 말해보자. 국제경찰이라고 자칭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지난 9.11 테러 직후 희생자를 추모하는 자리에서 예수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는 전 조지 부시 대통령의 말은 다음과 같다. ' 역사를 위한 우리의 책임은 이미 명확합니다. 공격에 대응하고 악의 세계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 이 말 이후 미국은 이슬람 국가는 마치 악의 세계이며 그를 제거하는 것이 선을 지키는 것이라 선전하였다. 그리고 이라크를 침공하였고 적은 미국병사의 희생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한국의 젊은이 또한 희생을 하라고 강요를 하였고 또한 희생이 되었다. 이러한 희생 속에 숨어있던 수많은 이라크 인들의 죽음, 그리고 아무것도 몰랐던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은 마치 그 사람들이 악의 세계에서 선의 세계로 바뀌는 과정에서 생기는 어쩔 수 없는 고통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두 전쟁의 진실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과 미국의 석유확보라는 것이 지금 밝혀진 두 전쟁의 진실이다. 자신의 석유같이 검은 마음을 속이고 그것을 성전이라는 화려한 포장지에 숨긴 전쟁, 과연 누가 악이고 누가 선이겠는가.
그렇다면 생각을 해보자. 과연 악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악마라고 말해어지는 것. 신과 악마가 서로 인간세계를 놓고 내기를 하고 있다고 말해지는 악마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학자들은 이 모든 선악의 신앙에 기원은 배화교라고 말 되어지는 조르아스토교의 영향이라고 말한다. 이 조르아스토교에서 말하는 것은 세상을 이원론으로 보고 참신 아후라마즈다와 악신 앙니 마니우스가 서로 태초부터 존재하고 다툰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그리고 그 선신이 이기기 위해서 이 선신을 믿는 사람, 마즈다이즘 또는 아샤반이 제사를 통해서 악신 앙니 마니우스를 이겨야한다는 것이다. 과연 현제 가장 악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종교에서 악은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생각을 해보자. 수많은 영화 속에서( 특히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영화 )속에서 악은 신과 대등한 존재, 그것이 아니면 신보다는 그 힘이 약하지만 인간들을 사악하게 물들여서 신과 대등한 존재로 되고자하는 존재 혹은 그 신을 누르고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욕심을 갖고 있는 존재를 말한다. 하지만 그 모태라고 말 되어지는 성서에서 보면 악의 대표라고 말 되어지는 사탄이라는 존재는 신과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라 신의 명령을 받고 그것을 실행하는 존재로 나온다. 예를 들어 예수는 악마에게 시험을 받았다. 하지만 그 시험은 성령에 이끌려 받은 것이지 성령의 허락이 없이는 예수에게 아무런 시험이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악이라고 말하여 지는 사탄이라는 존재, 즉 악마의 존재는 신의 심부름꾼이라고 성경에서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악마의 개념을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적용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에서 강한 위력이 갖고 있던 신앙이 공산주의로 변한 국가를 칭하면서 그 공산주의는 악마의 주의고 그것을 타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고 공산주의가 몰락한 지금의 시점에서는 그 악마를 자신과 다른 종교인 이슬람 국가에 빗대어 말하는 것뿐이다.
종교가 사람들의 도덕심에 미치는 영향
우리는 보통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남을 위할 줄 알고 도덕적이며 또한 자신의 희생과 봉사를 할 줄 알기에 그 사회가 안정되고 행복함을 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는 종교에서 말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잘못된 것을 고치고 옳은 방향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통계에서 보면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과 그와 반대로 그 사회가 어떠한 사람들에게 해택과 편안함을 주는 것인지 보여주는 지표와 그 사회의 안정성이 비례한다는 자료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지표를 통해서 우리는 종교가 인간에게 미치는 것은 불합리함을 참는 것도 사람에게 도덕심을 심어주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 도덕적이고 사회의 안정성을 높이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안정성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면서 종교적인 나라는 바로 미국이다. 이러한 현상은 국가별 GDP와 종교성의 관계에서 특이하게 미국만이 좋은 종교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큰 종교성이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도덕성은 얼마가 될 것인가. 미국은 선진국중 그 어떤 나라보다도 훨신 높은 약 4배 정도의 살인율을 보이고 있다. 또한 감옥이라곳에 수감하는 인원조차 다른 선진국에 비하여 약 12배정도의 비율로 높게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떠나서 자살이라는 것을 보아도 신앙심이 투철한 미국의 청소년에 자살율은 유럽의 자살율보다 약 2배정도의 차이를 보이면서 높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낙태와 임질이라는 성병이나 근원적인 생명에 대한 것조차 미국은 다른 유럽에 비하여 높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신앙심이 투철하면 도덕적이라는 것을 반하는 것이며 이것은 단순히 신앙심으로만이 사람이 도덕적으로 살라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얼마 전 큰 화제가 되었던 영화가 있다. 그것은 미국의 의료정책을 비판하는 것으로써 제목은 'Sicko'라는 것이었다. 그 영화에서는 미국의 사회보장제도중 하나인 의료보험에 대하여 나온 것이며 그 의료보험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안 좋은 것인가. 또한 보장을 받는 사람들은 한정되어 있으며 그 보장 또한 받는 사람에 비하여 자신이 지출해야 되는 것은 대단히 큰 것이며 그 큰돈은 그 사람들을 파멸로 이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보장제도인 국가의료보장제도를 가장 먼저 반대하는 것은 미국의 기독교단체에서이다. 또한 저소득층의 복지 또한 반대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교육은 사회의 자유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식에 사회의 양극화를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본적 원인은 잘 사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신실한 사람을 축복한다는 것에 있겠다.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나라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교육을 사회의 자유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나 제주도에 설치하려고 했던 영리병원 추진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근본주의자에 대하여
우선 현 한국의 기독교를 지배하고 있다고 하는 복음주의 기독교인의 식으로 성경의 한 구절로 이야기를 해보자. 마태복음(마테오의 복음서) 22장 39절에는 이러한 말이 나온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사람이 자신의 몸을 위해 무엇을 하겠는가? 필요 없는 작은 부분이라고 해서 썩고 병들었다고 해서 그의 몸을 버리고 다른 것으로 교체하려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현실에서 복음주의로 대두되는 현 대한민국의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재산을 정당화하고 그것을 네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힘을 위해서 더 많은 것을 바라고 그것을 키워나가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무엇이 많은 자의 재산을 정당화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환경을 지배하는 것인지 생각을 해보자. 과연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이 대표적으로 말하는 그 사람이 신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생활이 비참하고 온전한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인가? 사람은 자신이 처해진 환경에서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현 시대를 살고 있다. 몇년전 통계청에서 나온 특정 대학의 입학에 비율을 보았을 때에나 가문이나 제력을 중심으로 본 한국 사회의 현상을 보면 과연 그것이 그 사람의 신실함으로 인하여 그 사람이 신에게 축복을 받아 잘 사는 것인지 그와 반대로 가난한 자가 그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세습되는 가난을 겪는 현상은 그 사람이 신실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합당한 이유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다만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형태일 뿐이다.
반대와 같음
다른 곳에서도 근본주의자들은 존재한다. 그것은 기독교와 현재 대립하고 있는 탈레반과 여러 무장단체가 존재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자식들에게 많은 교육을 시키지 않는 다고 한다. 코란을 읽고 또 읽고 그것을 다 외울 때까지 읽게 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것은 기독교의 복음주의인 기독교 근본주의자와 같은 것이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과 코란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 이 같은 점은 서로 싸우고 있지만 같다는 것이다. 다시 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코란의 내용만을 암기하도록 강요받은 체 아무런 글자를 모르는 문맹률이 높다. 즉, 말하면 자신들의 원하는 내용만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 외에 아무런 정보도 앎의 해택도 주지 않는 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강요받은 교육은 자신의 진리만이 온 세상을 뒤덮은 진리고 그 외에 사람들은 자신의 공동체를 방해하는 적이며 사탄이며 악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에게 칼을 내밀어도 그 사람들에게 죽음이라는 것을 선물해도 자신은 선인이기에 천국에 갈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는 것이다.
또한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 코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강제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즉, 타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강제로 이슬람으로 만들지 않는 다는 것이며 그와 반대로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 타 종교로 바꾸는 것을 강제로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슬람에 모든 국가들은 이슬람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을 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막고 있다는 것이며 이를 어기면 명예살인이라는 것으로 사형을 시킬 수도 있다는 것에 있겠다. 이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자신들이 만들 법으로써 침해하는 것과 다른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재미있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이슬람과 기독교는 재미있게 참으로 같으면서도 다르다. 서로의 모순점이나 잘못된 점을 알면서도 고칠려고 시도하지 않으며 그를 반하는 세력이 있으면 자신의 적으로 간주하고 없애버릴려고 혈안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더 재미있는 것은 유일신이라는 존재가 같다는 것이다. 하나의 유일신을 믿으면서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신의 아들로 인정을 하는 것이고 다른 쪽에서는 그저 선지자로 예언자로 인식한다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함마드가 천사의 소리를 들었을때 그것이 귀신의 소리가 아닌 천사에 소리라고 말하여 준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유대인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다 잊고 서로 사탄의 자식이라고도 말하고 또한 악의 축, 자신들의 공동체를 해하는 세력이라고 말하고 싸우고 있으니 참으로 재미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만 그 속에서 그저 단체의 뜻에 따라서 죽어간 생명들에게 처량함이 느껴질 뿐이다.
인간은 그저 인간이다.
하늘을 보자 우리는 하늘조차 알지 못한다. 하물며 신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자신의 위로 알고 있는 신의 뜻을 알 수 있겠는가? 자신의 뜻이 하늘의 뜻이라고 신의 뜻이라고 단언하지 마라. 그것은 스스로에게 신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의 뜻을 옳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집단주의와 종파주의에 연장선일 뿐이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길은 나와 남이 같아야하는 하나의 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길을 인정하고 서로에게 아낌없는 행복을 선사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